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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인구와 경제에 대한 정보

유럽 역사에서 중세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던 5세기부터, 르네상스와 더불어 1500년경 근세가 시작되기 전까지를 가리킨다. 즉 대략 5-15세기가 중세다. 중세의 특징은 국왕이 영주에게 봉토를 주면, 영주는 국왕에 복종하면서 기사와 농노를 거느리고 자기 영지를 다스리는 봉건체제였다. 또한 국가의 우위에 서거나 서로 대립하던 시기다. 중세는 지배계급에는 축복의 시대였을지 몰라도 대다수 피지배계급의 삶은 고단한 그 자체였다. 중세의 농노는 주인의 물건으로 취급했던 고대의 노예보다는 나았지만 자영 농민과 달리 토지를 갖지 못해 반종민, 반노예 신분이었다. 영주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지으며 각종 노역과 세금을 감수해야 했다. 이동에 제약이 있었고, 교회에 세금도 내야 했다. 끊임없는 영토 전쟁으로 인한 각종 부담은 고스란히 농노에게 전가되기 일쑤였다. 이 시기에는 인본주의 문예부흥 운동인 르네상스가 있었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거장들이 응징해 신이 아닌 인간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고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은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어 교황의 무소불위 권위에 심대한 타격을 안겨줬다. 이는 중세를 붕괴시킨 정신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의 큰 변화는 반드시 물질적 토대의 변화 때문에 이뤄지게 마련이다. 즉 경제적 요인이 작용해 역사를 바꾼다는 이야기다. 이와 관련해 그레고리 맨큐는 맨큐의 경제학에서 색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생산요소 측면에서 중세 붕괴의 원인을 14세기 유럽에 창궐한 페스트, 즉 흑사병에서 찾은 것이다. 흑사병은 이름 그대로 '검은 죽음의 병'이었다. 흑사병은 1347년 몽골 군대가 대치하던 제노바 시를 향해 흑사 방 환자의 시신을 보내면서 유럽에 전파되었다는 설과 그전부터 동방 원정에 나섰던 십자군 병사들이 보석과 동방의 문화를 약탈해 오는 과정에서 한센병 및 흑사병을 옮겨왔다는 설이 있다. 유럽 대륙에 순식간에 퍼져 나간 흑사병은 고작 3년 만에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을 거쳐 벨기에와 네덜란드,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국가에까지 이르렀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유럽 인구의 3, 4명 중 1명이 흑사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어림잡아 2,500만 명이 사망한 셈이다. 14세기 이탈리아의 작가는 흑사병을 피해 시골로 피신한 남녀 10명이 열흘 동안 나눈 100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형제의 독일 설화 집에 실린 독일 하멜른에서 130여 명의 어린이가 사라진 1284년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사라진 어린이들은 당시 유행했던 십자군 원정에 따라간 것으로 추정되는데, 나중에 쥐잡이 이야기가 더해졌다고 한다. 흑사병은 주로 페스트균에 감염된 쥐에 기생하는 벼룩이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인구가 줄어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 나라의 인구가 갑자기 감소하면 당장 사회계층의 급격한 변동으로 이어진다. 인구의 3분의 1이 줄어든 중세 유럽에서는 특히 농노들의 사망률이 높았다. 농사를 지을 노동력의 부족으로 여주들의 파산이 잇따랐고, 노동자의 몸값은 급격히 오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지리상의 발견이 속속 이어지면서 상업이 발달했고, 도시에서는 상공업에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영주들이 예전과 같은 농노의 신분으로 붙잡아 둘 수 없게 된 것이다. 집단생활을 하는 수도원은 흑사병의 피해가 가장 컸다. 이는 성직자 부족 사태를 낳아, 자연히 성직자에게 요구되는 자격조건도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성직자들의 전반적인 수준이 하락하면서 16세기 종교개혁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흑사병은 실제로 경제구조를 바꿔놓았다. 흑사병이 유행하는 동안 평균 임금은 2배 상승했지만 땅값은 50% 이상 하락했다. 살아남은 농민들은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고, 지주계급의 소득은 급감했다. 급작스러운 인구 감소나 증가가 인건비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는 우리나라의 외환위기 때도 있었다. 1997년 당시 30개였던 은행은 퇴출, 합병이 이어지면서 그 수가 절반으로 줄었고, 은행원 수도 약 12만 명에서 8만 명으로 급감했다. 그렇다고 업무량이 줄어든 것이 아니었으므로 3명이 하던 일을 2명이 해야 했다. 그만큼 생산성이 높아지고 임금도 올랐다. 그 결과 외환위기 전에는 금융권에서 하위권이었던 은행원의 임금은 현재 가장 높은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인구 증가 속도를 과대 계산한 통계적 오류와 농업과 공업의 혁명적 발달을 예상치 못한 실수를 범했다. 물론 피임법조차 개발되기 전이라, 도덕적 자제만이 인구 증가를 막는다고 보았다. 도시화와 보건의료 및 교육의 확대로 사망률과 출생률을 동시에 낮아지기 시작하는 단계를 지나, 맞벌이가 일반화되어 많아야 2~3명의 자녀를 낳는 오늘날의 상황을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지난 200년간 너무 빠른 속도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면서 인류는 계속 현기증을 느끼고 있다. 일각에서는 지구 환경 보호를 위해 산업화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자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정말로 환경을 보호하는 방법은 숲 속에 오두막을 짓고 자급자족하며 사는 삶이 결코 아니다. 너도나도 그랬다가는 숲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고 산속 개울물도 깨끗할 수 없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도시에 모여 더 높은 고층빌딩에서 살아야 그나마 많은 녹지를 파괴하지 않고 물도 덜 오염시킬 것이다. 이것이 연구와 환경의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