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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세금에 관한 정보

오늘날에는 어느 나라나 소득세, 법인세, 소비세, 관세 등으로 세금제도가 정비돼 있다. 하지만 고대와 중세는 물론 근대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세금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 필리프 4세 때인 1303년에 신설한 창문 세였다. 집의 창문 숫자에 따라 세금을 물리는 것으로, 영국도 이를 모방해 2969년 창문 세를 도입했다. 그 때문인지 유럽의 오래된 건물에는 창문이 기형적으로 작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본 에도시대에는 건물 앞 면적에 비례해 세금을 물렸기 때문에, 일본의 옛 건축물 중에는 정면은 좁고 내부가 깊숙이 들어간 건물이 즐비하다. 영국과 웨일스에는 난로 하나당 2실링의 난로 세를 물렸다. 프랑스혁명 직전 재무장관 에티엔 그 실루엣은 사람이 마시는 공기에 과세하는 공기 세를 제안했다가 강한 반대에 부딪혀 넉 달 만에 사임하기도 했다. 로마 제국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오줌 세를 도입했다. 이 세금은 소변을 보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라 공중화장실의 오줌을 거둬가는 양모 가공업자에게 물린 것이다. 양모 업자들은 오줌으로 양털에 묻은 기름기를 뺐다. 러시아의 황제 표트르 1세는 수염 세로 유명하다. 그는 낙후된 러시아를 유럽 강대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서구화 정책을 표방하며, 1698년 귀족들에게 후진성의 상징인 수염을 자르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긴 수염은 러시아의 오랜 풍습이자 정교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었기에 귀족은 물론 교회의 반발이 거셌다. 그러자 표트르 1세는 수염을 기르는 사람에게 해마다 100 루블씩 내게 하고, 깎지 않으면 공직에서의 추방과 특별 통행세 징수라는 불이익을 안겼다. 그뿐만 아니라 1705년에는 턱수염 금지령을 성직자와 농노를 제외한 모든 계층으로 확대했다. 이 황당한 수염 세는 표트르 1세가 사망하고 40년 뒤에야 사라졌다. 그렇다면 '좋은 세금', '바람직한 과세란 무엇일까?' 거위가 아프지 않게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털을 뽑는 것이 현대 국가의 숙제다. 최저고가 세에 대해 일찍이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4가지 조세 원칙을 제시했다. 각자의 능력에 비례해, 즉 국가의 보호 아래 누리는 수입에 비례하여 걷어야 한다. 둘째, 확실성의 원칙이다. 납세자가 내야 할 세금이 확실히 규정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무 당국이 자의적으로 세금을 늘리고 줄일 여지가 있다면 조세행정이 공정하게 집 해된다고 보기 어렵다. 셋째, 편리성의 원칙이다. 납세자 관점에서 세금 납부의 편의성을 고려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금, 현물 등 편리한 방법으로 적절한 시기에 납세할 수 있게 해 줄 필요가 있다. 넷째, 경제성의 원칙이다. 이는 세금을 걷는 데 들어가는 비용에 관한 것으로, 납세자들의 부담과 국가가 징수한 세금의 차이가 작으면 적을수록 좋다. 아무리 좋은 세금이라도 걷는 데 비용이 많이 든다면 효율적인 과세라고 할 수 없다.  아울러 조세가 자원 배분을 왜곡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상적인 과세는 자원 배분에 영향을 주지 않는 중립적 조세다. 또한 개인의 근로의욕이나 기업활동을 위축시킨다면 이는 사회적으로 중대한 비용을 유발하는 것이다. 과도한 세금은 늘 탈세와 지하경제를 키우게 마련이다. 세금은 세율이 높거나, 징세원이 많거나, 세무조사를 철저히 한다고 많이 걷히는 게 아니다. 경제가 꾸준히 성장하고, 납세자들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세율일 때 최적과세가 실현되는 것이다. 이는 납세자와 정부 사이의 영원한 딜레마이기도 하다.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라부아지에는 과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에도 불구하고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은 불행한 과학자다. 라부아지에는 최초로 물을 산소와 수소로 분리하고 질량 보존의 법칙을 발견한 인물로,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1789년에 펴낸 화학의 원리는 근대 물리학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뉴턴의 프린키피아에 비견될 만한 책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위대한 화학자가 왜 단두대의 이슬이 되었을까? 라부아지에는 밤에는 화학자였지만 낮에 징세 청부인(국가에 고용된 세금 징수 업자)이었다. 그가 25세 때 징세 청부인이 된 것은 연구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국가나 기업의 지원 없이 개인이 자기 돈을 들여 연구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직접세는 행정조직이 걷고, 간접세는 징세 청부인에게 맡겼다. 약 3만 명에 달했던 징세 청부인들은 일정액의 세금을 정부에 내면 나머지는 자기 수입이 되므로 폭력과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그만큼 시민들에게 악명 높은 존재였으며, 성서에서도 부패한 세리, 즉 징세 청부인이 대표적인 죄인으로 자주 언급하였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징세 청부인은 귀족, 성직자와 마찬가지로 타도 대상이 되었다. 라부아지에는 1794년 끝내 사형 판결을 받고 51세의 나이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수학자 라그랑주는 그의 목을 자르는 것은 일순간이지만 그와 같은 목을 만들려면 100년 정도 더 걸릴 것이라고 애통해했다. 과중한 세금은 역사를 바꾸거나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것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쁜 세금'과 광범위한 세금 회피가 매우 중요한 원인이었다. 세금 징수에 군대까지 파견하느라 비용이 더 많이 들게 됐다. 비효율적인 세금제도가 로마를 서서히 멍들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 이념의 이면에는 불합리한 세금제도가 촉발한 분노가 도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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